2015년 6월 7일 일요일

여정의 속도

이스라엘의 광야의 여정은 느긋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정의 주도권을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쥐고 계셨기 때무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왕의 대로'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가장 빨리 당도할 수 있는 길도 외면하셨다.  이미 아는 길에서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해진 길에서 시간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넘어가게 된다. 예측 가능한 미래에는 하나님이 계실 공간이 없어진다.
광야는 낯선 공간, 낯선 시간을 제공한다. 인도자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곳이다. 여기서는 '빨리 가기'와 '멀리 가기'는 의미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가기'와 '함께 가기'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실은 자신들이 광야이고 하나님이 길이시란 것을 깨달아야 했다. ...

그들의 광야같은 심령이 먼저 가난안 땅이 되었을 때, 인생의 새로운 장르가 열렸을 때, 가나안이 그들에게 길을 내 주었다.

느긋한 여정은 하나님의 속도에 맞춰 하나님과 함께 걷는 여정이다.

혹시 지금 하나님보다 더 큰 보폭으로, 더 빠른 속도로 걷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보다 더 바쁘고, 하나님보다 더 서두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다가 하나님이 나를 놓칠지도 모른다.

묵상의 여정  18.묵상 여정의 속도(1)p257-260

느긋하게 걷는다는 것

특별히 영적 여정에서 느긋하게 느릿느릿 걷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얼마나 천천히 걸어야 느리게 걷는 것인가?이렇게 느긋하게 걸으면서도 신속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느림, 여유, 여백은 모두 이미 충분히 가진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그것이 게으름이나 나태함과는 어떻게 다른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들이다. 느긋하게  사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지속이다. 끝냄이 아니라 끊음이고, 돌아감이 아니라 돌아봄이다. 경주가 아니라 완주다.

묵상의 여정  18.묵상여정의 속도(1) p250

속도는 이정표를 보지 못하게 한다

속도는 이정표를 보지 못하게 한다. 너무 빠른 속도는 우리에게 '방향감각'을 잃게 만든다. 등산을 하다가 조난을 당한 적이 있다. 해 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큰 길로만 내달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만 이정표를 보지 못한 것이다. 더 빠르게 달리면 달릴수록 나는 이르러야 할 곳과 멀어졌다. 속도를 내면 낼수록 이정표는 안중에 없었다. 그럴때 믿는 것은 자기 확신 뿐이다. 길이 사라지고 날이 어두워질수록, 돌아가야 할 길이 아득하게 멀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속도의 노예가 되어 갔다.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 더 빠른 속도가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영적조난을 당한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자기 정당화다. 영적 여정에서 이정표를 무시한 것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묵상 여정의 이정표는 성서와 성령과 성도다. 느릿하게 걸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우리의 온 몸을 수신기로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앞서 본 대로 영적 여정의 동반자인 공동체와 더불어 걸울 수 있다. 그것들이 늘 내 속을 드나들면서 내 안의 길을 내도록 허용해야 한다.

 묵상의 여정 18.묵상 여정의 속도(1) p249-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