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림 선교사
2017년 1월 6일 금요일
2015년 6월 7일 일요일
여정의 속도
이스라엘의 광야의 여정은 느긋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정의 주도권을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쥐고 계셨기 때무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왕의 대로'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가장 빨리 당도할 수 있는 길도 외면하셨다. 이미 아는 길에서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해진 길에서 시간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넘어가게 된다. 예측 가능한 미래에는 하나님이 계실 공간이 없어진다.
광야는 낯선 공간, 낯선 시간을 제공한다. 인도자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곳이다. 여기서는 '빨리 가기'와 '멀리 가기'는 의미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가기'와 '함께 가기'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실은 자신들이 광야이고 하나님이 길이시란 것을 깨달아야 했다. ...
그들의 광야같은 심령이 먼저 가난안 땅이 되었을 때, 인생의 새로운 장르가 열렸을 때, 가나안이 그들에게 길을 내 주었다.
느긋한 여정은 하나님의 속도에 맞춰 하나님과 함께 걷는 여정이다.
혹시 지금 하나님보다 더 큰 보폭으로, 더 빠른 속도로 걷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보다 더 바쁘고, 하나님보다 더 서두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다가 하나님이 나를 놓칠지도 모른다.
묵상의 여정 18.묵상 여정의 속도(1)p257-260
느긋하게 걷는다는 것
특별히 영적 여정에서 느긋하게 느릿느릿 걷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얼마나 천천히 걸어야 느리게 걷는 것인가?이렇게 느긋하게 걸으면서도 신속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느림, 여유, 여백은 모두 이미 충분히 가진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그것이 게으름이나 나태함과는 어떻게 다른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들이다. 느긋하게 사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지속이다. 끝냄이 아니라 끊음이고, 돌아감이 아니라 돌아봄이다. 경주가 아니라 완주다.
묵상의 여정 18.묵상여정의 속도(1) p250
속도는 이정표를 보지 못하게 한다
속도는 이정표를 보지 못하게 한다. 너무 빠른 속도는 우리에게 '방향감각'을 잃게 만든다. 등산을 하다가 조난을 당한 적이 있다. 해 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큰 길로만 내달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만 이정표를 보지 못한 것이다. 더 빠르게 달리면 달릴수록 나는 이르러야 할 곳과 멀어졌다. 속도를 내면 낼수록 이정표는 안중에 없었다. 그럴때 믿는 것은 자기 확신 뿐이다. 길이 사라지고 날이 어두워질수록, 돌아가야 할 길이 아득하게 멀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속도의 노예가 되어 갔다.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 더 빠른 속도가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영적조난을 당한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자기 정당화다. 영적 여정에서 이정표를 무시한 것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묵상 여정의 이정표는 성서와 성령과 성도다. 느릿하게 걸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우리의 온 몸을 수신기로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앞서 본 대로 영적 여정의 동반자인 공동체와 더불어 걸울 수 있다. 그것들이 늘 내 속을 드나들면서 내 안의 길을 내도록 허용해야 한다.
2015년 5월 31일 일요일
하나님의 길
묵상의 여정은 신앙의 여정이다. 그것은 '몸'으로 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몸이 허락하는 속도만큼 그 여정을 감당할 수 있다. 몸이 느끼고 지각하고 반응하여 마음으로 전달되는 만큼 그것이 내 성품이 되고 인격이 된다. 그때 우리는 우리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신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을 되밟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유하게 내 속에서 만들어 가시는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된다. 그 여정은 끝이 있지만 , 끝에 당도하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 여정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를 묻지 않고 어느 방향으로 달려왔는지를 묻는다.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묻지 않고 어떻게 달렸는지를 묻는다.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묻지 않고 어느 방향으로 달려왔는지를 묻는다. 누구를 제쳤는지를 묻지 않고, 누구와 동행했는지를 묻는다. 과정의 총합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묻는다.
묵상의 여정 245 페이지
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600년의 교회역사
아래 글은 이라크 그리스도인에 대한 글로서
"지난 1600년간 기독교예배가 전파된 이후 처음으로 Mosul에 예배가 없어졌다.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은 참수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결과적으로 죽음까지 이르게되는 "
"In fact, on June 15 no Christian services were conducted in Mosul for the first time in over 1,600 years! Our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are being beheaded and crucified. And soon, we will face a society that demands that we forsake our Biblical values and accept its Godless dictates or suffer the consequences. Eventually, those consequences will also include death. "
이라크에 이렇게 오래도록 교회가 존재해왔고, 예배를 드려왔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였다.하나님의 성령께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끝까지 지키고 계심을 눈으로 목도하는것 같다.